Skip to content
뒤로

리뷰: 거란어 《성》에 대하여

국내에서 거란문자(契󠄁丹文字) 자료를 직접 다루는 정식 연구자는 세 손가락 안에 들만큼 드물다. 선구적인 연구를 통해 거란어학의 초기 단계에서 견고한 방법론적 기반을 마련한 신태현(辛兌鉉)이라는 선학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국내 학계는 후학의 단절로 인하여 그 명맥이 온전히 이어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국내 연구자에 의한 거란어 연구의 동태를 주시해왔다.

거란어를 둘러싼 연구성과는 한국어사 규명이라는 난제에 중요한 새 증거를 제공할 잠재력이 있다. 거란어학을 연구하는 국내외 학자들이 종종 한국어 증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한민족과 거란민족 간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가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거란어와 고대 한국어의 역사적 관계를 추적하려는 연구는 그 자체로 큰 가치를 지니는 학술적 시도이나, 그것이 오직 한국어학의 수단으로써 거란어학을 다루려는 도구주의적 접근으로 전락할 경우, 거란어학의 학술적 엄밀성을 훼손하는 본말전도가 될 우려가 있다.

중국 내몽고대학(內蒙古大學) 주최 『20252025년 몽골학연구국제학술대회』의 산출물로 간행된 「고전문헌」「문화 및 전파」 연구부문의 논문집에서 권두를 장식한 것이 단국대 이성규(李聖󠄁揆) 명예교수의 발표문 Кидан хэлний “хэрэм балга (城)” хэмээх үгийн тухайд 「거란어 어휘 《성(城)》에 대하여」이다. 이 글을 읽고 든 생각이 바로 앞서 언급한 본말전도이다.

요지

이성규(20252025)는 거란어 əm 《성》을 고대 한국어 어휘와 관련짓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전개한다.

  1. 거란어와 몽골제어 간의 밀접한 관련성을 논한 뒤, 《성》을 의미하는 거란어 어휘를 거란소자(契󠄁丹小字) 및 거란대자(契󠄁丹大字) 자료에서 추출하여 그 非몽골어적 특성을 논한다. 구체적으로 , 거란어 əm 《성》은 유사한 뜻의 몽골어 단어 balγasu, čaiǰa, kerem 등과 형태적 연관성이 없음을 지적하여, 해당 어휘가 고대 한국어 등 타 언어와 연결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2. 몽골어파의 불안정 */n 명사어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해당 거란어 어휘에서도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복수접사 및 격어미가 결합된 용례를 검토하고 그 흔적이 나타나지 않음을 확인한다.
  3. 대신에 거란소자 자료에 나타나는 특정 표기를 근거로 해당 어휘의 기저형을 새롭게 재구한다.구체적으로는 제11음절에 m, 제22음절에 l 또는 r 를 포함하는 ×ma-ol(r) 를 기저형으로 제안한다.
  4. 새롭게 추정한 음가를 바탕으로, 『삼국사기』와 『호태왕비』(好太王碑) 등에 기록된 고대 한국어 어휘 「모라」(牟羅) 및 일본어 むら mura와의 관련성을 제시한다.

※전제

이하 모든 재구음은 大竹昌巳식으로 기재한다. 원문에 제시된 그대로 인용해야 할 경우에는 재구음 앞에 가위표를 첨하였다. əm 의 어의(語義)는 편의상 《성(城)》으로 잠정한다. 거란대자 관련 논의는 배제한다.

논평

거란어를 비롯한 선비제어(鮮卑諸語)는 몽골제어와 분명한 계통적 관계가 확인되면서도, 시기적으로 늦은 몽골제어에 없는 일부 독자적 개신을 공유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유하 얀후넨(Juha Janhunen)이 para-Mongolic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이래, 현재는 앤드류 시무넥(Andrew Shimunek) 등에 의해 제기된 보다 일반화된 계통 분류가 정착되고 있다.

ʻPre-Proto-MongolicʼProto-Mongolic(Northern)Modern MongoliclanguagesʻPara-Mongolicʼ(Southern)Kitan†Taghbach†
얀후넨(2003)의 계통 분류

몽골조어XT(후이스 톨고이 비문의 언어)몽골제어선비제어탁발어거란어
오타케(2018)의 계통 분류

그럼에도 중국과 국내 학계의 일부 연구자 사이에서는 오늘날에도 거란어를 마치 중세 몽골어의 직계 조상인 양 서술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이성규와 김태경(金泰京)의 저작에서 이러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해이한 계통론적 토대 위에서 어휘사를 추적할 경우, 몽골조어에서 계승된 어휘 층위와 일치하지 않는 거란어 어휘의 존재가 선비어파의 독자적 개신일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형태적인 유사성에만 의지하여 외적 차용어로 간주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우려가 있다.

əm 《성》을 중심으로 몽골어파에서 나타나는 불안정 */n 명사어간의 흔적을 거란어에서 찾으려고 한 시도는 흥미로우나 유의미한 논증에 실패했으며, 따라서 이것이 해당 논문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안정 */n 어간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부정적 결론에 도달한 뒤, 그 부정적 결론을 논문에 그대로 남겨둔 것은 저자의 사고과정을 불필요하게 노출한 것에 불과하며, 퇴고 단계에서 배제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거란어에도 어말자음 n 을 수반하는 불규칙 명사어간은 선행연구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몽골어의 경우와 달리, n 어간 범주에 속하는 명사는 영(零)접사형에서만 -n 을 보존하고 접사 후속형에서는 -n 이 탈락된다1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전통적인 연구는 편의에 따라 단일 자소에 대해 복수의 음가를 자의적으로 배당하곤 했는데, 보다 엄밀하고 예측가능한 다케우치(武内) 및 오타케(大竹)의 체계에서 əm 《성》은 어말 m 을 포함하는 자음어간 범주에 속하므로, 처음부터 불안정 */n 어간 여부를 논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더욱 중대한 문제는 저자가 기초적인 텍스트 비판에 실패하였다는 점이다. 이 논문에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는 글자(자소의 조합)인 『耶律(韓)迪󠄁烈太保墓誌銘』22121행 제88자의 취급이 특히 문제가 된다.

(1)
 keen  ǰəw  šəm  ǰəw χäär 둘.m  əmoľ?-ən 성?-gen  toγʷ  šii 使  bool-dələər 되다-pp.m

「현주와 심주 두 지방의 절도사가 된…」

이성규는 구체적인 설명 없이 “Гэрэлт хөшөөний бичээсийг тайлж уншихад олон тооны залгавар биш гэдэг нь тодорхой байна.”(비석의 명문을 해독해보면 복수 접사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논하지만, 수사 《둘.m》이 《성(城)》을 직접 수식하고 있으므로, 는 복수 접사 -z 를 포함하는  əm-z-ən 《성-pl-gen》으로 교감되어야 마땅하다. 지스(卽實)도 가 고례(孤例)임을 지적하며 로 올바르게 교감하였다.3

(2)
 keen  ǰəw  šəm  ǰəw χäär 둘.m  əm-z-ən 성-pl-gen  toγʷ  šii 使  bool-dələər 되다-pp.m

「현주와 심주 두 지방의 절도사가 된…」

명백한 오기인  ×mə-ol(r) ×mə-(i)r 《성》과 관련지은 것도 무리한 전개이다. 중국어의 來母로 음사되는 자음을 포함하는 자소들은 문헌 상에서 나타나는 동어이철자(同語異綴字)의 상보적 분포를 바탕으로 세 가지 계열로 분석되며, 서로 다른 계열에 속하는 자소는 원칙적으로 상호 교체될 수 없다. ‹ər›는 설정공명음 r 을 포함하는 A계열, ‹oľ›는 전설측면음 ľ [ɬ̠ʲ] 을 포함하는 B계열에 속하므로,4 둘을 동어이철로 간주하여 연결하려는 시도는 음운론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논문은 자소 판독의 오류에서 기인한 사상누각에, əm 《성》에 대응되는 동원어가 몽골어에 없으니 차용어일 것이라는 새로운 가정을 얹은 뒤에야, 한적(漢󠄁籍)과 금석문에 주로 「牟羅」와 같은 표기로 기록된 고대 한국어 *mora 및 일본어 むら mura 와 관련짓는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이 결국은 əm 《성》를 고대 한국어 어휘에 연결하기 위한 작위(作爲)라는 인상을 받았다. 보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거란어 əm 《성》에 대한 한문 대역으로 「城」이라는 글자가 쓰였다고 해서, 거란어 əm 의 일차적인 의미가 《성》이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으며, 연구자에 따라 《땅》 《방면》 등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기도 한다. 따라서 거란어 əm 과 고대 한국어 *mora 의 의미적 대응은 저자가 전제하는 것만큼 자명하지 않다.

결론

이 논문은 거란문자 자료의 체계적 해독보다는, 「고대 한국어와의 관련성」이라는 결론을 미리 설정해두고 이에 맞춰 자료를 논지의 형편에 맞춰 불성실하게 해석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성규 명예교수의 은퇴로 인해 국내 거란어학의 명맥이 완전히 끊길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 이러한 기대 이하의 논문이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것은 유감스럽다.

전통적인 거란어학의 방법론은 문헌학적 접근에 머물러 있었고, 2020세기 후반에 발표된 획기적인 연구성과들도 명백한 이유 탓에 모두 문헌학적 고증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20102010년대에 거란어학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맞이한 뒤에야 비로소 거란문자 자료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언어학적 대상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란어학에서 구시대의 산물이 되어가고 있는 문헌학적 접근을 택했음에도 그 문헌학적 고증에 실패했다는 점이 이 논문의 심대한 결함이다.

참고문헌

  • JANHUNEN, Juha (ed.). 2003. The Mongolic Languages. Routledge Language Family Series. Routledge.
  • 大竹昌巳 (20182018) 「契丹語を俯瞰する」 AA研共同利用・共同研究課題 「モンゴル諸語における言語変容」 20182018年度第22回研究会
    ____ (20202020) 『契丹語の歴史言語学的研究』 博士学位論文
  • 卽實 (20122012) 『謎󠄁田耕耘――契󠄁丹小字解讀續』 遼󠄁寧民族出版社󠄁

각주

Footnotes

  1. 大竹[2018:132018:13].

  2. 卽實[20122012]의 『空訥墓誌』, 大竹[20202020]의 『Sarağaň Dileed 相公墓誌銘』 〔S.DIL〕.

  3. 卽實[2012:8042012:804]. 「, 抄本作 誤󠄁 無例」.

  4. 관련 논의는 大竹[2020:87932020:87–93]에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