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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ㅅ자 플리마켓 2026」을 다녀오고

밤새 비가 쏟아붓다가 아침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개여 빨래를 널었다. 흐린 날에는 좀처럼 외출하지 않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요행(僥倖)이다. 지난 일 년 동안 기대를 품고 기다려온 「文ッ字フリマ20262026」(문ㅅ자 플리마켓 202620261이 오늘부터 이틀 간 진행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이 플리마켓을 처음 알고 참가했을 때, 나는 앞으로 매년 33월마다 마치다(町田)에 오겠구나 하는 예감을 얻었다. 문자, 작자(作字), 무엇보다 폰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행사는 같은 취양과 다양한 심미안을 가진 문자 애호가들이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귀중한 자리인 것이다.

탈탄수(脫炭水) 넷 제로 식단2을 실천하며 철야를 한 상태였음에도 두 다리를 힘겨이 움직여 집을 나섰다.졸음과 허기 때문에 일 년에 단 이틀 동안 진행되는 성대한 축제를 놓칠 수는 없는 법이다.

출발~

「문ㅅ자 플리마켓」은 매년 33월 말에 도쿄도3 소재의 마치다시민문학관(町田市民文学館)에서 진행된다. 내 거소에서 마치다까지는 두 번의 환승 수속을 거치는 왕복 33시간의 장정(長程)이기에, 조발무장장(早發武藏藏)4의 비장한 각오로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평일이라면 통근 러시의 시간대지만 주말이라 차내는 비교적 한산하다. 롱시트에 앉아 논픽션 『지구행상인:아지노모도 그린베레』를 읽으니 금세 오다큐선 마치다역에 도착하였다.

도보로 1010분, 개장 시각을 거의 맞춰서 시민문학관에 도착했으나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북적인다. 시민관은 총 33층이며, 모든 층에 부스가 전개되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동선이 다소 효율적이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치이며 부스를 돌아야 한다.

인산인해의 2층

우선 22층을 둘러보는데 작자(作字) 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부스가 많았다. 작자는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눈도장을 찍어두기만 하고 상품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방언 작자」(方言作字)라는 흥미로운 테마로 책자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부스가 있길래, 「방언한자」(方言漢󠄁字)를 작자한 것이냐고 물어보았는데, 판매자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그게 무엇이냐고 되물어왔다. 견본을 펼쳐서 보니, 요새 일본 한자학계에서 핫한 방언한자와는 전혀 무관한, 일본 4747개 도도부현을 이미지로 타이포그래피 아트를 제작한 미술적 시도였다. 내 관심사는 아니지만 필경 많은 품이 들어간 작품이었기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개인적인 관심은 공예품보다는 폰트 그 자체에 있으므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FONTDASU의 부스였다. FONTDASU는 상업이용이 가능한 무료 일본어 폰트를 제작하여 Google 폰트 등에 제공하고 있는 폰트 공방으로, 한때 나도 신세를 진 바 있다. 이번에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고딕 활자를 복각하여 해설하는 책자를 판매하고 있었다. 견본을 적당히 살펴보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떴다. 어차피 내가 살 물건은 이미 정해져 있다.

보물은 언제나 최심부에 있다

숨막히는 22층을 탈출하여 주저없이 33층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내가 사려고 한 문자 관련 칼럼과 서체 견본을 포함하는 동인지 『風音島』(풍음도)5의 신간을 마주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재고가 간사이국제공항에 묶여 있어 플리마켓 당일까지 초기 물량 외의 추가 재고 확보가 곤란할 것 같다며6 X\text{X}에서 우는 소리를 했지만, 일찍 방문한 덕인지 충분한 재고가 쌓여 있었고, 다행히 나머지 재고도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마련될 것 같다고 하였다. 폰트 크리에이터 kohakuno 씨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4,0004\text{,}000엔을 지불하여 2026.32026.3 신간을 구입했다.

『풍음도』는 취미가부터 현직 디자이너까지 다양한 분야의 문자 애호가 여럿이, 흥미로운 발견이나 서체에 대한 열의, 디지털 환경에서 폰트를 다룰 때 도움이 되는 노하우, 그리고 직접 디자인한 폰트의 견본을 한데 모은 호화 동인지이다. 작년에도 구입하여 당일에 전부 읽어버린 기억이 있는데, 현장에서 구입할 경우가 가장 저렴하고, 또 무엇보다 집필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다양한 지식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부스 방문은 필수이다. 그러나 그만큼 미친듯이 붐비는 부스이기도 하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중국의 문자 애호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전설적인 「명쾌타자기」(明快打字機)의 디지털 체험을 도와주고 있었다. 너무 사람이 몰려서 내 이름을 명쾌타자기로 입력할 수 있는지 체험해보지 못하고 물러섰으나, 컴퓨터 비전 기술을 바탕으로 CJK\text{CJK} 서체를 개발하고 있는 항저우 기반의 스타트업 JadeFoci의 전시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덤으로 인간 디자이너가 설계하고 AI\text{AI}가 확장시킨 서체 33종의 견본 스티커를 500500엔에 구입하였다.

CJK 폰트 개발의 최전선

곧 이어 11층의 JadeFoci(智琮科技) 및 TrionesType(璇璣造󠄁字)7의 공동 부스를 방문했으나 아직 준비중이었다. 서체 디자이너 쑤위(玊玉) 씨 홀로 부스를 진열하고 있었는데, 나를 위해 손글씨 글자가 순식간에 정돈된 서체로 가공되는 AI\text{AI} 모델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존재하지 않는 글자도 생성할 수 있다.AI\text{AI}의 창조력을 활용하여 CJK\text{CJK} 문자 처리와 서체 개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값진 시도이다. 특히 TrionesType은 국제적인 폰트 포럼에도 공격적으로 참여하며 CJK\text{CJK} 폰트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 세계에 선포하고 있다. 스타일을 유지한 채 기존 폰트를 확장하거나, 외자(外字)는 물론 존재하지 않는 신자(新字)까지 생성해내는 놀라운 기술력은 중국 정보공학의 굴기를 뽐내는 듯하다. 이러한 선진적인 기술을 한글에까지 적용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완성형 한글 역시 한자와 마찬가지로 폰트 개발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 문자체계이기 때문이다. 점심 즈음에 다시 와달라는 안내와 함께 명함을 수령하였다.

철야・공복 상태에서 카페인을 섭취하고자, JR\text{JR} 마치다역 쪽의 스타벅스에서 이 글을 작성하고 『풍음도』2026.32026\text{.}3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1313시경에 JadeFoci 부스를 다시 찾아가 쑤위 씨의 안내를 받아 손글씨 AI\text{AI} 작자 체험 및 AI\text{AI} 전각(篆刻) 체험8을 즐기고, 쑤위 씨가 개발한 「춘분」 게임을 플레이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JadeFoci 사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고, 당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AI\text{AI} 보조 글리프 생성 기술에 대해 엔지니어 분(활동명: Celestial Phineas)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현재 일본을 여행 중이라 만나뵐 수 없었고, 다만 기술적인 지식을 갖춘 다른 디자이너 분이 행사에 합류할 예정이라 하여 전화번호를 남기고 33층을 다시 방문했다.

오전에는 붐벼서 해보지 못했던 「명쾌타자기」(明快打字機)의 웹 시뮬레이터를 Willie Liu(劉育黎) 씨의 안내를 받아 체험해보았다. 글자의 좌상단과 우하단의 요소를 차례로 입력하여 변환 후보를 추리는 천재적인 「상하형 검자법」(上下形檢字法)을 도입하여 타자기의 물리적 한계를 돌파한 「명쾌타자기」를 태블릿 PC\text{PC}의 화면을 통해 직접 타이핑해보니 입력 원리를 이해하기 수월했다. 타자기 특유의 기교인 「겹쳐 찍기」를 통해 비교적 자유롭게 합자(合字)를 입력해낼 수도 있지만, 내 이름의 벽자는 여전히 입력할 수 없었다. 디지털 재현이라고는 해도 「명쾌송조체」(明快宋朝體; Mingkwai Fangsong)를 복각시켜놓았기에 상당히 몰입감이 드는 체험이었다. 중국의 영상 크리에이터 허퉁쉐(何同學)가 실제로 작동하는 「명쾌타자기」를 제작한 바가 있으나, 전기적으로 재해석된 것이라 완전한 복원과는 거리가 있었고, 현재 Willie Liu 씨는 실기(實機) 복원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조만간 웹 시뮬레이터도 일반공개될지 모른다.

후기

졸음이 쏟아져 시민문학관을 뒤로 했다. 한동안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오다큐선 위에서 단잠에 들던 새에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니 이미 요요기우에하라(代々木上原)역이었다. 간만에 같은 취미가들과 교류한 즐거운 경험이었다. 특히 내 집요한 질문 공세에도 친절하게 응대해주신 쑤위 씨에게는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전철에서 폭수(爆睡)하느라 전화를 받지 못하여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전리품
전리품

주석

Footnotes

  1. 일본어의 촉음을 한국어의 정서법적 사이시옷에 대응시킨 무책임한 번안을 부디 너그러이 봐달라.

  2.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포스트를 마련하겠다.

  3. 마치다시(町田市)를 가나가와현의 행정구역으로 취급하는 인터넷 밈이 존재한다.

  4. 무자시(武藏)의 티베트(藏)라는 뜻이다.

  5. 일본어 한자음으로 읽으면 「후온토」, 즉 「폰트」를 늘려 읽은 발음이 된다.

  6. 쑤위(玊玉) 씨에 따르면, 재작년부터 중국에 기반한 크리에이터가 『풍음도』에 대거 참가하기 시작했고(한자문화권의 유대는 대단하다), 생산단가를 낮추고자 인쇄 비용이 저렴한 중국에서 생산하게 되었다고 한다.

  7. TrionesType은 JadeFoci 사의 하위 브랜드이다.

  8. 안타깝게도 내 이름은 중국어 기준으로도 벽자(僻字) 취급이라 생성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