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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창의성, 가짜 학문, 가짜 직업

기술의 숙련을 창의성으로 포장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믿는다. 정보의 비대칭성에 의존하던 학문과 직업의 시대도 종언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보인다. 내게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또 자칫하면 특정 학문이나 직종을 비하하는 듯하여 빈축을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 또한 한때 가짜 창의성으로 이목을 끌었고, 가짜 학문을 하고 있으며, 가짜 직업을 얻고자 분투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겠다.

위기감을 느끼는 자가 분노한다

20222022년, Midjourney와 Stable Diffusion 같은 생성형 AI\text{AI} 서비스가 예술계를 덮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창의성」을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 인간 예술가의 작품에 크레딧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하기도 하였다. 20252025년, Anthropic이 수백만 권의 중고책을 매입하여 디지털화한 뒤 대형언어모델 훈련에 사용한 것을 미 법원은 「공정이용」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였고, 이에 수많은 작가들이 「창의성」의 강탈에 분노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핵심 쟁점은 저작권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그와 관련된 복잡한 제반사정은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주목하고자 하는 문제는 창의(創意)의 본질이다.

나는 미술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니기에 이러한 분노에 진정으로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분노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자신이 시장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기에 그 경쟁대상에 경계심을 품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기되는 방어기제이다. 그러나 인류 문명의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에 이른 현시점에서, 여태 「창의성」이라고 칭송되어온 것 가운데 진정한 의미로 창의적이었던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장인 기술의 숙련은 「창의」에 해당하는가

기술의 숙련이 곧 창의성으로 포장되던 시대가 있었다. 생성형 AI\text{AI}는 이 창의성 인플레이션의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다. 기계가 동일한 수준의 양식적 변주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 작업에 붙어 있던 「창의성」이라는 꼬리표가 실제로 얼마만큼의 가치를 담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셈이다. 분노의 진짜 원인은 생성형 AI\text{AI}가 창의성을 훔친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라고 믿었던 것의 정체가 드러난 것에 있다.

창업군주와 수성군주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이런 구절이 있다.

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잇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나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으리이까

건국할 때와 치세할 때에 요구되는 능력은 전혀 다르다. 이른바 창업군주와 수성군주의 차이이다. 이 비유가 당장 창의성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지 몰라도, 내가 착목한 창조와 숙련의 대립 구조와 굉장히 닮아 있다.

중국사에서 창업군주는 非한족 용병 집단 출신이 많았다는 사실은, 창업에는 파괴적인 무력이 필수적임을 뒷받침한다. 반면 국가의 기틀을 세워 왕조를 유지하는 것은 문화통치의 영역이다.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을 장악하면 오래지 않아 한화(漢󠄁化)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립 구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창의는 필연적으로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질서와 상식을 깨부수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다. 숙련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가 00에서 11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숙련은 11100100으로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전자의 맥락이다.

숙련은 이미 존재하는 장르 위에서 일어나느 변주이다. 그러나 이미 잘 닦인 토대 위에서 참신한 변주를 이룩해내는 예술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겪어 손기술과 장인기술을 연마하여 기존의 명작을 모방하는 것이 현실이다.

창업가와 후계자

구조적으로 유사한 또 다른 사례에 착목해보자. 독자적인 사진식자(寫眞植字)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시킨 이시이 모키치(石井茂吉)는 서체 기업인 주식회사 샤켄(写研)의 창업자이기도 하다. 사진식자 기술의 혁신성은 기존의 비효율적인 활판인쇄 기법을 대체하고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공학 기술과 뛰어난 디자이너를 갖춘 샤켄의 패권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한국의 인쇄업계도 샤켄에게는 다대한 신세를 졌다.

그러나 샤켄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2대째인 이시이 유코(石井裕子)가 회사를 말아먹은 탓이다. 그녀는 Adobe의 제안을 거절하고 일본어 서체의 디지털화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 결과 샤켄(写研)은 컴퓨터 시대에 도태되었고, 샤켄의 수많은 아름다운 서체들은 오랫동안 디지털 서체로 복각되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부활하기 시작했다. 그 고집스러운 판단이 일본의 출판・디자인 업계에 미친 원죄는 헤아릴 수 없다.

이시이 유코는 막장 경영과 히스테릭한 성격으로 악명 높지만,아버지의 위업으로서 물려받은 샤켄과 사진식자 기술에 대한 애착만큼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초대 사장과 제22대 사장을 가른 것인가. 후계자는 패러다임 전환을 읽지 못하고 창조적 파괴에 실패했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서는 샤켄의 정체성과 다를 바 없는 사진식자 기술을 과감히 버려야 했다. 그러나 기존 기술의 숙련화에만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새로운 「창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직업과 학문의 본질

예술의 본질이 기술적 숙련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의성으로 기울어가는 가운데, 직업과 학문의 본질에 대해서도 파격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정보를 봉쇄하는 자들

컨설팅, 금융, 학술 영역 등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때때로 그 전문성이 「정보 격차」의 형태로 나타나 수익 모델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학위, 자격증, 업계 네트워크, 고가의 데이터베이스 접근권은 정보 격차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다. 고객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익의 원천이다.

이 모델은 지금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형언어모델(LLM\text{LLM})이 전문 지식에 대한 접근 비용을 제로에 수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변화의 속도를 고려할 때, 현재의 반례들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안다」라는 것의 경제적 가치가 급락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위와 값비싼 학술 자료에 대한 접근권만으로, 실질적인 통찰 없이 기존 연구의 재배열에 그치는 작업이 「논문」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어온 역사가 있다. 이것은 비단 인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며 학문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진정한 학술적 기여와 제도적 관성 위에서 재생산되는 작업 사이의 간극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AI\text{AI}는 그 간극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가시화하고 있을 뿐이다.

봉쇄하는 자와 개방하는 자

흥미로운 대비가 하나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커뮤니티는 오픈소스라는 사상적 전통 위에서, 자신의 직업을 대체할 수도 있는 도구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왔다. 자신이 쌓아온 경제적 해자를 스스로 허무는 파괴적이자 창조적인 행위이다. 물론 개발자 사회 내부에도 AI\text{AI} 코드 생성에 대한 반발은 존재하고, 저작권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화의 방향성, 지식은 공유될수록 가치가 커진다는 신념만큼은 뚜렷하다.

반면, 정보 봉쇄를 사업 모델로 삼아온 산업들의 반응은 대체로 방어적이다. 정보 격차가 곧 밥줄인 곳에서, 그 격차를 해소하는 기술을 환영할 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인의 유무와 관계없이 봉쇄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붕괴의 순서는 예측 가능하다. 제도적으로 보호되지 않는 한, 산업의 정보 비대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그 위에서 행해지는 작업에 요구되는 진정한 창의성이 낮을수록, 더 빨리 대체된다.

생산수단의 해방

보다 근본적인 층위에서, AI\text{AI}는 생산수단의 독점을 해체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에 기반한 기술혁명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AI\text{AI} 기술혁명이 인류 문명의 마지막 산업혁명이 될 것임은 이미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숙명이다.

그림을 그리는 손기술, 코드를 작성하는 능력, 법문을 이해하는 지식은 생산수단이지 직업의 본질이 아니다. 시각 예술의 본질은 붓을 다루는 기술에 있지 않으며, 소프트웨어 개발의 본질은 문법에 맞는 코드를 타이핑하는 데 있지 않다. AI\text{AI}가 이 생산수단의 진입장벽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본질에 해당하는 능력, 즉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창의성과 행동력의 실제 분포이다.

그 분포는 기존의 직업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미대를 나오지 않았지만 탁월한 예술적 사유를 가진 사람이 입시체계를 통과한 숙련공보다 더 의미 있는 작업을 해낼 수 있게 된다. 전공자가 아니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학위의 권위로 질문 자체를 회피해온 사람보다 나은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이, 코드 작성에만 능숙한 엔지니어보다 뛰어난 IT\text{IT} 서비스를 런칭할 수 있게 된다.

파괴는 곧 해방이자 새 창조의 원동력이다. 이 해방의 과정에서, 기존 생산수단의 독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 생산수단을 획득하기까지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하루가 달리 변화하는 현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는 것

아직도 20232023년도의 인상으로 생성형 AI\text{AI}를 냉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형언어모델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66개월 전의 인상으로 미래를 논한다. LLM\text{LLM}이 채용하는 아키텍처 자체에 회의감을 품는 사람도 많다(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간의 척도는 가속도적으로 축소되어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일주일은 속세의 11년과 같고, 11년은 1010년과 같다. 다음 한 세기는 유사 이래 인류가 이룩해온 모든 문명적 발전보다 거대한 도약을 실현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선형적 과거의 상식에 머물러서도 안 되고, 현시점의 최신 정보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새로운 미래가 먼저 도래한다. 인지를 초월한 가속도적 발전의 시대에 돌입하였다.

처음에는 견습 예술가가, 그 다음에는 주니어 개발자가, 그 다음에는 문과 사무직의 신입사원이 교체되기 시작했다. 다음은 무엇일까? 기술 혁명이 파괴하는 것은 분명하다. 정보의 봉쇄, 생산수단의 독점, 허위의 창의성. 그러나 파괴 이후에 남는 것도 분명하다. 진정한 통찰, 진정한 창의성, 진정한 판단・실행력. 이것들은 기술혁명의 가속도적 발전이 진행될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더 정확하게 평가될 것이다.

나 자신이 그 평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판별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게 된 임박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