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과 실제는 다르다.
도시미관을 테마로 한 국내 웹 커뮤니티를 순회하다보면, 이상하리만치 「복층 한옥」(물론 기와지붕)에 대한 갈망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실증되는 복층 한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단층 주거 양식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던 한국 사회에서 복층 한옥은 이상치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1 그렇기 때문에, 결핍으로 인한 갈망을 채우고자 함인지는 몰라도, 생성형 모델을 구사하여 복층 한옥 번화가를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그들은 왜 자국 전통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증가능한 형태로 뒷받침되지 않는(덜 엄밀히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복층 기와건물 번화가를 망상하며 만족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의문이었다. 이전에도 논한
한국 전통건축이 주변국과 비교해서 「초라」해보이는 이유는, 어김없이 일제의 잔재 때문이었구나! 좋아요 만이 찍힌 게시물이다. 이와 같은 레퍼토리(즉 남탓)는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인기가 있어서 유사품이 많다. 구조적으로 유사한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 세기 말부터 유행해온 황당무계한 음모론, 즉 일제가 한국사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만 권의 조선 서책을 태웠다는 망설(妄舌)을 들 수 있겠다. 민족 주권과도 얽히는 선정적인 주장은 민중의 호응을 얻기 용이하지만, 이것이 사회 전반에 깊게 침투할수록 학문으로 뒷받침되는 역사관은 「식민사관」이라는 불썽사나운 칭호와 함께 권위를 잃게 되고, 위서와 유언비어를 따르는 온갖 잡다한 시정잡배들이 설치게 된다.
물론 실제로 일본이 훼손시킨 한국의 전통건축은 많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는 그러한 훼손 행위 때문에 한국에 「교토급」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원 게시물의 주장을 추궁하는 데 있다.
나무는 불에 잘 탄다
목조 건축이 주류였던 동아시아에서는 한중일을 막론코 건물의 소실(燒失)과 중축(重築)을 반복해왔는데, 나무가 불에 활활 잘 탄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원 트윗에서 이상화하여 추켜올리는 교토조차, 오닌의 난(応仁の乱)을 비롯한 숱한 내전과 대화재로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변한 역사가 한두 번이 아니다. 관백의 거소였던 에도(江戸) 역시 메이레키의 대화재(明暦の大火)로 에도성 천수각을 포함한 도시의 절반 이상이 불타 없어지는 참상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중일의 역사 도시들이 보여주는 건축적 풍요로움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화재와 전란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태워버리지만, 잿더미 위에서 건물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나아가 이전보다 더 발달된 건축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가부(可否)는 철저하게 당대 사회의 경제적 역량에 종속된다.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의 건축
과거 조상들은 일본의 도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일본으로부터, 당시 조선의 건축 현실을 훔쳐보는 것도 가능할 터이다.
조선통신사가 남긴 사행록에는 당시의 조선 사대부가 바라본 일본 도시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복수의 사행록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서술에 따르면, 일본 도시의 번화함과 건축의 규모와 경제적 수준은 조선의 도성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동아시아 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의 중원 대도시와 비교해도 일본의 도시가 더 번화하다는 평가마저 있다.
다만 한 가지 비판적 태도를 요하는 것은, 통신사의 이동 경로가 주요 가도(街
穿市廛間, 比屋
連󠄀 甍, 無寸地空閒, 人民之庶, 物貨之盛, 眞大都也。 시전 사이를 뚫고 집집마다 용마루가 이어져 한 치의 땅도 빈 곳이 없었다. 인민의 많음과 물화의 성함이 참으로 대도시였다.오윤겸 『동사상일록』 정사(1617)년 8월 18일
이러한 압도적인 경관은 단발적인 인상에 그치지 않는다. 세대가 바뀐 뒤에 파견된 사신들의 눈에도 일본의 도시는 빈틈없이 구획된 번화한 상업도시로 비추어졌다.
道󠄁 路如砥, 井井有條, 長廊󠄂 傑閣, 接擁左右, 無一片空地, 無一家草蓋。 도로는 숫돌처럼 평탄하고 구획은 바둑판처럼 정연하다. 긴 행랑과 우뚝한 누각들이 좌우로 빼곡히 맞닿아 있다. 빈터는 단 한 곳도 없으며, 초가집은 단 한 채도 없다.남용익 『부상록』 을미(1655)년 9월 5일
수도 한양조차 도성을 조금만 벗어나면 초가집이 즐비했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초가집이 단 한 채도 없」는 광경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그 물질적 번영은 급기야 중국 강남(江南)의 제일가는 도시들과 견주어지기에 이른다.
大抵城池之堅固, 舟楫之
精󠄀 巧, 樓閣之壯麗, 人物之繁盛, 駭人心目, 未見蘇杭之前, 想此爲第一矣。 대저 성지의 견고함과 주즙의 정교함과 누각의 장려함과 사람과 물자의 번성함이 사람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여, 중국의 소주(蘇州)나 항주(杭州)를 보기 전에는 생각건대 이곳을 제일이라 하겠다.김지남 『동사일록』 임술(1682)년 7월 26일
이 막대한 부의 원천은 다름아닌 상업의 발달이었다. 세기에 접어든 사행록의 서술은 길가를 빼곡히 메운 복층 상업건물, 즉 조닌(町人) 계층의 상업 자본이 축조해낸 번화가를 묘사하는 데 집중된다.
行可六七里而至
館󠄁 , 其間夾道󠄁 長廊󠄂 , 莫非層󠄁 搆, 是爲百貨肆, 人之觀者, 充滿塡塞, 華靡眩眼,視󠄁 江岸倍盛, 至此而精󠄀 神󠄀 又眩, 不知歷幾街而穿幾町, 但見一路平󠄁 直無塵埃。 예닐곱 리쯤 가서 관에 이르렀는데, 그 사이 길 양쪽의 긴 행랑은 층계집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는 잡화점이었다. 구경하러 온 자가 길을 가득 메웠고, 번화함은 눈을 어지럽게 하니 강기슭에서 본 것의 갑절이었다. 이곳에 이르러 정신이 또 아찔해졌으며, 몇 거리를 지나고 몇 동네를 통과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보이는 것은 평탄하고 곧은 길에 먼지가 없다는 것뿐이었다.신유한 『해유록』 기해(1719)년 9월 4일
단순히 건물의 규모가 크고 층수가 높은 것만도 아니었다. 조밀하게 늘어선 복층 건축은 저마다 축적한 부를 과시하듯 극도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통신사의 혼을 빼놓았다.
自船艙至
館󠄁 所󠄁 , 殆近󠄁 十里, 而左右長廊皆是層󠄁 構, 非有十字通󠄁 衢, 則屋頭相連󠄀 , 綵帳高褰, 繞以金屛, 補以紅氈, 煌煌爛爛, 如過󠄁 錦繡堆中。 선창에서 관소까지 거의 십 리에 가까운데, 좌우의 긴 행랑이 다 층계집이었다. 십자로가 된 곳이 아니면 지붕 머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비단 장막을 높이 걸어 둔 데다 금빛 병풍을 두르고 붉은 모전을 기워놓았으니, 휘황찬란하여 마치 비단 무더기 속을 지남과 같았다.조명채 『봉사일본시견문록』 무진(1748)년 4월 21일
이러한 물질적 풍요와 번화의 절정은, 세기 중엽에 수행한 김인겸의 한글 가사(歌辭) 작품에서 조선 제일의 도심과 직접적으로 대비되며 마침내 적나라하게 대비된다.
- 하뉵ᄒᆞ믈 쳥ᄒᆞ거ᄂᆞᆯ상륙함을 청하거늘
- 삼ᄉᆞ샹을 뫼시고셔삼사상(三使相)을 모시고서
- 본원ᄉᆞ로 드러갈ᄉᆡ혼간지로 들어갈새
- 길흘 ᄭᅵᆫ 여염들이길을 낀 여염들이
- 졉옥년장ᄒᆞ고접옥연장(接屋連牆)하고
- 번화부려ᄒᆞ야번화부려(繁華富麗)하여
- 아국 죵노의셔아국 종로보다
- 만 ᄇᆡ나 더ᄒᆞ도다만 배나 더하도다
김인겸 『일동장유가』 3:12ㄱ–ㄴ
년 월 일, 조선통신사 삼사(三使)2는 감히 타기에도 외람되는 휘황찬란한 금루선(金樓船)에 올라, 당대 토목기술의 정수인 반듯하게 정비된 운하를 거쳐 오사카에 상륙하였다. 인구 만에 육박하는 상업번화의 대도시에 발을 디딘 김인겸은, 오사카 소재의 사찰 혼간지(교토 소재 정토진종 니시혼간지의 별원에 불과하다!)의 번화함을 보고 한양 종로의 만 배도 더 된다고 묘사했다.
- 우리나라 도셩 안은우리나라 도성 안은
- 동의셔 셔의 오기동에서 서에 오기
- 십 니라 ᄒᆞ오되ᄂᆞᆫ십 리라 하지마는
- 채 십 니ᄂᆞᆫ 못ᄒᆞ고셔ᄂᆞᆫ채 십 리는 못하고서는
- 부귀ᄒᆞᆫ ᄌᆡ샹들도부귀한 재상들도
- ᄇᆡᆨ 간 집이 금법이요백 간 집이 금법(禁法)이요
- 다 물쇽 흙 지와ᄅᆞᆯ다 모두 흙 기와를
- 니워셔도 장타ᄂᆞᆫᄃᆡ이어서도 장(壯)타는데
- 장ᄒᆞᆯ손 왜놈들은장할손 왜놈들은
- 쳔 간이나 지어시며천 간이나 지었으며
- 그듕의 호부ᄒᆞᆫ 놈그중에 호부(豪富)한 놈
- 구리 기와 니어노코구리 기와 이어놓고
- 황금으로 집을 ᄭᅮ며황금으로 집을 꾸며
- 샤치키 이샹ᄒᆞ고사치하기 이상하고
- 남의셔 북의 오기남에서 북에 오기
- ᄇᆡᆨ 니나 거의 ᄒᆞᄃᆡ백 리나 거의 하되
- 녀염이 뷘틈업서여염이 빈틈없어
- ᄃᆞᆷ북이 드러시며담뿍이 들었으며
- ᄒᆞᆫ가온대 낭화강이한가운데 나니와강이
- 남북으로 흘러가니남북으로 흘러가니
- 텬하의 이러ᄒᆞᆫ 경천하에 이러한 경치
- ᄯᅩ 어ᄃᆡ 잇단 말고또 어디 있단 말인고
- 북겨을 본 역관이북경을 본 역관이
- ᄒᆡᆼ듕의도 와 이시ᄃᆡ행중(行中)에도 와 있으되
- 듕원의 장려ᄒᆞ기중원의 장려하기
- 이에셔 낫쟌타ᄂᆡ이보다 낫잖다네
김인겸 『일동장유가』 3:15ㄱ–ㄴ
이처럼 조선 중・후기의 사대부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오사카의 번화함과 건축의 규모 및 화려함은 조선의 어느 도성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북경을 다녀온 역관마저도 중원의 장려함이 이보다 낫지 않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명심할 것은 위의 인용은 모두 오사카에 대한 인상 기술이라는 점이다. 경섬 『해사록』()에 따르면, 관백이 머무르던 에도(江戸)의 풍족함과 사치스러움은 여태까지 지나온 곳들을 훨씬 능가했다.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나고야 등 쟁쟁한 도시들을 거쳐오고도 더 큰 충격이 종착지에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반면 많은 사행록에서 「왜경」(倭京), 즉 교토의 번화함은 오사카나 에도에 비하면 덜하다고 하였다.
부유한 재상조차 기껏해야 흙 기와를 얹고 백 칸을 넘지 못하는 옹색한 집을 지어야 했으며 세기 초까지 한양에 초가집이 즐비했던 조선의 건축 실정과, 구리 기와를 얹고 황금으로 집을 꾸미며 사치를 부리던 일본 건축의 물질적 격차는 「왜란・호란」이나 「유교국가의 검소함」 등 흔해빠진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해소될 수 없는 이면이 존재한다. 바로 국부(國富)의 차이다.
무엇이 부를 갈랐는가
이 물음만으로 별도의 글을 요하겠으나, 간단히 왜 이토록 격차가 벌어졌는지 나름대로 추려본 양국 간의 제도적 배경의 차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도시 번화상(像)은 분권적인 번(藩) 체제의 산물이다. 약 삼 백 개 번이 제각기 독립적인 경제권을 운영하면서 상호 경쟁적으로 조카마치(城下町)를 발전시켰고, 참근교대(參勤交代)에 의한 권력집단의 주기적 이동은 가도(街道) 연선의 슈쿠바마치(宿場町)와 물류 거점에 끊임없는 소비 수요를 창출했다. 이 체제 속에서 조닌(町人) 계층은 사실상의 자치적 상업 공간을 확보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자본이 상업건물과 화려한 번화가의 건축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인다.
조선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도를 구축했다. 한양(
양국 간의 사회구조적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화마가 도시를 덮친 뒤에 건물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역량은, 일회적인 국가 재정의 여유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분산된 민간 자본의 축적 규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왕궁 중건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한다?
한국의 건축 문화재 보존이 역내에서 상대적으로 저조한 이유를 외침 탓으로 돌리는 건 이전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전란이 조선에만 있었는가? 오사카성을 예로 들어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년에 건설한 오사카성은 년의 오사카 전투 때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고 년에는 전소되었다. 전소 년만인 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의해 재건을 시작하여 년에 화려한 천수각을 갖춘 새로운 오사카성이 탄생하였다. 이 사업은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보청(天下普請)이라는 동원령 체제를 통해 각국의 다이묘들에게 자재와 노동력을 조달케 하여 수행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반면 조선은 「경복궁」 중건만으로 국가 경제가 휘청인다. 나라의 법궁(法宮)을 재건한다는 심대한 중요성을 띤 이 사업은, 경복궁이 임진왜란의 여파로 전소된 뒤 놀랍게도 약 년 간 미뤄오다가 세기 말에 겨우 착수한 것이다. 조선의 중앙 재정은 그 자체로 빈약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천하보청에 비견할 만한 동원적 장치도 결여하고 있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원납전(願納錢)과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하여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어야만 했다.
결국은 회복탄력성의 문제이다. 국부(國富)가 빈약하고 그것을 동원할 제도적 기반마저 취약했으니, 무너진 건물을 다시 지을 돈도 노동력도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파괴
일제는 한반도의 전통적 도시 구조에 불가역적 개조를 가했다. 읍성(邑城)을 체계적으로 철거하여 성곽 도시로서의 형태를 해체했고, 경복궁 전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축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적 공간을 일개 역사 관광지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의 대상이 된 것은 조선 후기까지 존속하던 규모의 전통 도시경관이지, 교토나 오사카에 비견될 법한 웅장한 사찰 건축물과 대규모 상업 번화가가 아니었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통신사 사행록이 기록하듯이, 그러한 규모의 도시경관은 일제가 오기 이전에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가 허문 것은 「있었던 것」이고, 원 트윗이 상실을 주장하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판타지 한국사
이 글은 한국의 전통건축이 한심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조선 후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성립한 한국 전통건축의 표준은, 주변 문화권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화이자 개성이다.
원 트윗이 악질적인 이유는, 분명하게 시행되었던 일제의 파괴 행위를 교묘하게 과장하여, 애초에 중세 이래 한반도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교토급」의 역사 도시가 일제에 의해 허물어진 것처럼 호도한다는 점에 있다. 일제가 읍성을 헐고 궁궐 전각을 훼손한 사실은 존재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에 「교토급」 역사 도시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화려한 상업 대도시가 자생할 경제적・사회적 토양이 부재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결핍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자국사를 직시할 책임을 방기한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교토급」4 입지를 지닌 도시라고 하면 기껏해야 경주, 평양, 개성으로 추려질 텐데, 뒤의 두 도시는 북한이 점거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경주」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경주」가 「교토급」 도시(여기서 경주는 시기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굳이 말하자면 일본 「나라」의 지위에 가깝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경주를 나라에 빗대는 것도 문화재 보전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나라에게 실례되는 비유라고 생각한다.)가 되지 못한 건 일본제국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교토는 세기 말 도쿄전도(東京奠都)를 계기로 천황이 도쿄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천 년 이상, 그리고 제법 최근까지 상징적인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던 도시이지만, 마찬가지로 천년고도라는 칭호를 관하는5 경주는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은 뒤로 다시는 제대로 재건되지 못한, 말하자면 한동안 버려졌던 고도(古
경주의 신비로운 사적들이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이고, 그 다음은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졸속 복원이다.년에 복원 완공된 월정교(月
존재한 적이 없는 판타지적인 한국사 세계관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한심하여 어쩔 수가 없다. 자국의 전통문화를 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 빈곤한 유산을 부정하고 남의 탓으로 돌린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겠는가. 우선 오만떼만데 적용되고 있는 남탓 근성과 과잉된 피해자 의식을 버리는 것이 안쓰러운 위무사관(慰撫史觀)에서 탈피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관련 서적
이 글에서 언급된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 도시」라는 주제에 흥미가 생겼다면, 김경숙 저 『에도시대 도시를 걷다』를 추천한다. 중・근세 일본을 이해하고, 또 무엇보다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통찰로 이어지는 시점을 제공한다.
주석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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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설명은 온돌 문화이다. 난방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단층 가옥이 발달했다는 논리이다. ↩
-
조선통신사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의 총칭. ↩
-
조선 후기의 송상(松商)・만상(灣商) 등이 일정한 상업 자본을 축적한 사실은 존재하지만, 이들이 도시경관을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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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날 「교토」가 교토로서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에도 상당한 행운이 개입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년에 교토를 원자폭탄 투하 후보지에서 제외한 것은 여러 기적적인 판단이 교차한 결과였으며,전후 일본이 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비롯하여 국가 차원에서 역사도시 보존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한 것도 교토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폭 투하 후보지가 「경주」 정도의 도시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
-
실제로는 신라가 국가로서 성립하기 전의 신화 시대를 끌어와도 천 년을 채우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