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뒤로

증기기관차의 매연에 생사혼미

몽환적인 꿈을 꾸었다. 초월적 존재로부터 시간의 의미를 전수받은 듯한 전능감과 함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광명체험, 그리고 눈을 뜨자 따가운 햇살이 창문을 뚫고 내 눈에 꽂히고 있었다. 나는 이내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 일기예보는 향후 일주일 간 단 하루 오늘만이 맑은 날임을 보여주었다. 새벽 늦게 잠들었음에도 이른 아침에 내 단잠을 깨트린 신비로운 꿈은, 밀린 빨래를 오늘 해치워야 한다는 계시였던 것이다. 급하게 세탁기를 돌리고 일광에 빨랫감 널기를 마친 시각이 20262026332121일 오전 88시 정각.

「지치부(秩父)와 나가토로(長瀞󠄁), 모험을 떠나자〜!」

오늘은 예감이 좋다. 그동안 미뤄왔던 모험을 떠나기에 알맞은 길일(吉日)이다. 변덕으로 시작된 당일치기 여행은 평소부터 머릿속에 어느 정도 그려져 있던 내용이기는 하나 다소 무모한 계획이었다.

출발~

일부 주민들로부터 「도쿄의 티베트」(는 아무리 그래도 과장이며, 진짜 「도쿄의 티베트」인 하치오지시나 니시타마군에 실례되는 표현이지만)라고 불리는 우리 동네에서 어딘가 멀리 가고자 한다면, 일단 이케부쿠로(池袋)를 향하면 실패가 없다.1 나는 이케부쿠로를 향하는 전철에서 세이부철도(西武鉄道)의 특급열차 라뷰(ラビュー)를 예약하려고 했으나,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대의 편은 매진되고 말았다. 간신히 11:3011\text{:}30 이케부쿠로 시발(始發) 12:4712\text{:}47 세이부치치부 종착 지치부1313호의 특급권을 구할 수 있었다. 승차권 800800엔, 특급권 900900엔으로 총 1,7001\text{,}700엔. 출발이 늦어진 것은 아쉽지만 맥도날드에서 여행 계획을 짜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케부쿠로 서쪽 출구의 맥도날드는 지하11층이 정답이다. 지상11층은 주문만 받으며, 22층은 믿을 수 없을만큼 항상 만석에 가까운 상태이기 떄문. 염치를 모르고 전기를 도둑질하며 조사를 개시한다.

지치부와 나가토로. 세이부철도의 차내 광고를 통해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세워보니 시간 배분이 문제이다. 기적일성(汽笛一聲), 부연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지치부철도의 증기기관차 SL\text{SL}팔레오익스프레스가 332020일부터 20262026년도 운행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내가 철도 오타쿠는 아니지만, 졸지에 철도 오타쿠 같은 기준으로, 몸이 저절로 여행 계획을 짜버리기 시작했다.

나의 플랜은 다음과 같다. 세이부이케부쿠로역에서 세이부치치부역까지 특급 라뷰 지치부1313호로 이동, 지치부에서 2020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오하나바타케(御花畑)역에서 나가토로역까지 지치부철도 보통열차(열차번호 3030)로 이동, 나가토로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나가토로역에서 구마가야(熊谷)역까지 SL\text{SL}팔레오익스프레스로 이동한다. SL\text{SL}은 하루에 한 번만 운행되기 때문에 지치부와 나가토로에서 오래 체류할 수는 없다. 한정된 시간 내에서 지치부에서는 지겐지(慈眼寺)를, 나가토로에서는 이와다타미(岩畳)를 둘러보기로 타협하였다.

경쾌하게 질주하는 특급 라뷰

이케부쿠로역의 세이부 개찰을 통과하여 장대하게 펼쳐진 플랫폼을 둘러보던 중, 특급권이 곧 매진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말 오전의 라뷰는 인기가 대단하다. 점심용으로 개찰 내의 훼미리마트에서 햄 치즈 샌드위치를 구입하였다.

특급 지치부13호
특급 지치부13호
8호차 내부
8호차 내부

특급 라뷰는 이미 입선(入線)해 있었다. 내 자리는 88량 편성에서 최후미인 88호차의 창가석이었는데, 라뷰의 차창은 거대하지만 아쉽게도 내 자리에서는 차창의 전반부로 시야가 제한되어 있었다. 시트 폭은 성인 남성이 앉아도 편안할 정도로 여유로우며(별것 아닌듯 보여도 일본에서는 모든 것이 비좁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차내는 청결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서 쾌적한 여행을 뒷받침해준다. 샌드위치를 탐식하던 중 열차는 이케부쿠로역을 떠나 나서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시야각이 좁아 슬슬 눈이 아파오자, 상시패용하고 있는 킨들로 얌전히 책이나 읽기로 하였다. 그런데 햇살을 받으며 독서에 매진하던 중, 어느새 열차의 진행방향이 역전된 것을 깨달았다. 한노(飯能)역에서 세이부 지치부선에 진입하면서 스위치백 운행을 실시한 것이다. 스위치백은 선로 구조상 열차의 진행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운행하는 방식인데, 이런 배선이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원래는 한노역이 종착역이었으나, 석회석 수송 수요에 응하여 19291929년에 아가노(吾野)역까지 노선을 연신하게 된다. 이때 기존 선로 방향으로 노선을 연장하려면 이미 번화한 시가지를 정면으로 관통하고 그 너머에는 험준한 지형을 돌파해야만 했다. 열차의 방향을 돌려 시가지 외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현실적인 타협의 흔적인 것이다.

아뭏든 도중에 좌석이 진행방향의 반대가 되기 때문에 승차감이 해쳐지는 문제가 있으나, 라뷰는 페달을 밟아 좌석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만석인 상태에서 좌석을 회전시켜도 껄끄러운 상석(相席)이 발생하기에, 모두가 역방향에 순응하며 종점까지 달릴 따름이었다. 금세 도착한 세이부치치부역에서 하차했다.

12년만에 공개된 지겐지의 본존관음

두리번거릴 여유는 없다. 곧장 목적지를 향하여 속보(速󠄁步)하여, 일본 백번 영장(日本百番靈場)・지치부 찰소 십삼번(秩父札所󠄁十三番) 등 수식어가 긴 조동종(曹洞宗) 지겐지(慈眼寺)에 다다랐다. 산호(山號)는 일본신화의 영웅 야마토타케루(ヤマトタケル)가 동정(東征)을 할 적에 깃발을 세운 영지라는 전승이 있는 기하산(旗下山). 세이부치치부역에서 도보로 44분 거리이다.

め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예로부터 눈 질환에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의 유리전(琉璃殿)에 모셔진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는 흔히 「눈의 부처님」이라고 불리며, 눈의 건강을 기원하는 히라가나 「め」가 크게 적힌 나무팻말이 봉납되어 있다. 안경 코받침이 콧등을 눌러 코가 아픈 건지 눈이 아픈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새전함에 11엔을 던져 넣었다.

더욱이 올해는 병오년, 즉 말의 해를 맞이하여 지치부 영장(靈場) 전체에서 1212년에 한 번 오세총개장(午歲總開帳)이 열리는 시기이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본존관음상이 올 331818일부터 11113030일까지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떠나,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공개는 띠를 한 바퀴 돌아 20382038년이 되는 셈이니 그 희소가치에 이끌린 셈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종교가 지니는 의미를 고려하면, 나의 지극히 세속적인 태도야말로 가장 일본적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운데 가장 거대한 건물에 모셔진 불상이 성관세음보살(聖觀世音菩薩)이다. 경내에서 가장 위엄이 느껴지는 건물 내에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자리잡고 있다. 단출한 유리전에 모셔진 약사여래의 참배객이 많다고는 해도, 본당을 1212년 동안 꽁꽁 잠가걸어놓는 것은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일본에는 즈시(厨子)에 가두어 일반인은 볼 수도 없게 모시는 비불(秘佛) 문화가 존재하는데,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특히 일본에서 두드러지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기원은 신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막연히 추측될 뿐이다.

고슈인
고슈인

스탬프랠리를 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미리 써놓은 고슈인(御朱印)을 500500엔에 구입했다. 고슈인초(御朱印帳)를 지참해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미리 준비된 종이(書き置き)를 사와서 나중에 풀로 붙이는 편이 시간이 부족한 나로서는 더 나은 선택지이기도 하다.

절에서 나와 약 11분 정도 걸어서 지치부철도 오하나바타케역에 도착했다. 역사의 간판은 다이쇼 로망(大正ロマン) 느낌의 레트로 서체로 적혀 있다. 「꽃밭」이라는 역명은 모순적이게도 꽃 한 송이 없는 이 낡은 역사조차 낭만적으로 만들어준다. 열차는 정시대로 13:2213\text{:}22에 발차하였다.

오하나바타케역 역사
오하나바타케역 역사

지치부철도를 타고 나가토로로

열차는 한동안 그야말로 로컬선다운 풍경을 뚫고 질주하다가 유명한 촬영 스폿인 지치부철도 아라카와교량(荒川橋梁) 위를 상쾌하게 건넜다. 평소 도쿄에서의 산책 코스였던(날벌레가 너무 많아 이제는 가지 않는다) 아라카와가 사이타마현 지치부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철교를 건너면 머지않아 나가토로역이다. 대부분의 승객이 여기서 하차한다. 라뷰에서 함께 탔던 관광객 대부분의 최종 목적지도 아마 이곳일 것이다.

교량 위에서 내려다본 아라카와
교량 위에서 내려다본 아라카와

나가토로에서는 한 시간 정도 체류할 수 있으니 여유롭게 역 주변을 걸어보았다. 역 바로 앞에는 나가토로의 명물인 급류 타기의 표를 판매하는 매대가 있다. 일본 삼대 급류(후지카와・모가미가와・구마가와)에 속하지는 못해도 나가토로 라인쿠다리(長瀞󠄁ライン下り)는 상당한 명물이다. 작은 목선을 타고 뱃사공의 영도 하에 아라카와의 급류를 타고 내려간다. 문제는 도착지에서 역까지 돌아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기암괴석의 이와다타미(岩畳)를 모험하기로 했다.

나가토로 급류 타기
나가토로 급류 타기

이와다타미와 지치부 적벽

나가토로역에서 55분 정도 걸어 기암괴석이 넓게 펼쳐진 이와다타미로 향했다. 이와다타미에서 바라본 북쪽 하류는 흡사 가미코치(上高地)를 연상시키는 절경. 다른 명승지에 빗대어 설명되는 것도 뭐하지만 가미코치에 비해 명성도 경치의 수준도 덜한 것은 사실이기에 어쩔 수 없다. 현장에서 「엄청 가미코치」(めっちゃ上高地)라는 감탄이 여러 번 들렸다는 사실도 나의 비유를 변호해줄 수 있다.

엄청 가미코치
엄청 가미코치

삐죽빼죽 흩어진 바위 무더기 위를 탐험해본다. 지하 깊은 곳에서 강한 열과 압력을 받아 퇴적암과 화성암이 변화해 만들어진 결정편암이 지층 위로 드러난 것이 이곳 이와다타미의 창세신화이다.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바위는 층층이 단면이 드러나 있는데, 의외로 걷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의 경사라 어린 관광객들도 용맹하게 탐험에 나서는 모양이었다.

강물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지치부 적벽(秩父赤壁)의 경치는 제법 볼만하다. 밑으로는 얕은 여울이 급하게 흐르고 있어 정적인 바위의 벽과 역동적인 급류의 물살이 재미있는 대비를 자아낸다.

지치부 적벽
지치부 적벽

당초 계획은 이와다타미를 따라 걸어 아까 열차를 타고 건넜던 아라카와교량까지 도보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이론상 속보로 걷는다면 왕복 2020분 내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갈수록 길이 험해지는 바람에 이대로라면 증기기관차를 놓쳐 계획이 파탄하기 때문에,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와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막상 역에 돌아오니 시간이 남아돌아서 혼났다.

칙칙폭폭 증기기관차를 타고 동진

흔히 C58363\text{C}58363(시고하치 산로쿠산), 아예 「시고하치」로 불리는 열차는 옛 국철(國鐵)의 증기기관차로서, 19721972년에 은퇴했으나 19871987년에 부활, 19881988년부터 지지부철도의 급행 지치부지(秩父路) 편성이 되었다. 도쿄 도심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정기 편성 증기기관 열차라는 점에서 시고하치의 인기는 상당하다. 철도 왕국인 일본에서 비일상감을 주는 열차는 철도 오타쿠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각광 받곤 한다.

1515시경에 나가토로역 개찰을 통과했다. 20262026년은 332020일부터 운행을 재개한 SL\text{SL}팔레오익스프레스는 151577분에 33번선에 진입했다. 이내 주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철도 오타쿠들이 어디선가 자연발생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친화적 관광지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숨이 턱 막히는 오타쿠적 분위기로 바꿔놓은 주역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거대한 카메라 렌즈를 들이미는 「찍철」2 , 동행에게 열차의 제원과 역사를 쉴새없이 읊어대는 「설명충」, 격한 감탄사와 몸짓을 연발하며 흥분하는 「발광충」이다. 철도 오타쿠의 삼종 세트, 이곳에 나타났도다. 운행 22일차여서 망정이지, 어제는 「퍼스트 런」이라는 헤드마크까지 부착되었기 때문에, 대포렌즈를 지참한 찍철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시고하치의 얼굴
시고하치의 얼굴
시고하치 견인차의 옆모습
시고하치 견인차의 옆모습

나 역시 그들 틈에 섞여 사진촬영을 시도하다가 발차 시간 아슬아슬하게 승차하여 11호차의 창가석에 앉았다. 지치부철도의 간판 열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압도적 스팀펑크의 비주얼은 남자의 가슴속 무언가를 자극하는 바가 크다. 우렁찬 기적소리와 함께 출발하자, 창밖으로는 손을 흔들어주는 인파의 주목을 받으며 철마는 천천〜히 가속한다. 과연 증기기관이로다!

증기기관차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비일상감에 있다. 일상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육중하고 이질적인 과거의 기계 뭉치가 매캐한 숨을 토해내며 질주하는 쾌감. 열차가 스쳐지나가는 건널목과 역마다 수많은 사람이 멈춰서 구경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밭 매던 농부도, 시골을 누비는 꼬맹이들도, 통과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시고하치를 구경하며 손을 흔드는 광경은 오늘날 참으로 보기 드문 낭만적인 풍경이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경치에 취해 창문을 살짝 열자, 바깥에서 매연의 매캐한 냄새가 훅 끼쳐 들어왔다. 폐부를 찌르는 그 노골적인 냄새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시야가 흐릿해지며 슬슬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구형 차량이라 창문 닫는 법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피할 수 없는 매연을 즐기며 어느덧 종착역인 구마가야역에 도착했다. 역에 내리자마자 수많은 철도 오타쿠의 군집에 완벽히 동화되어 기관차의 늠름한 자태를 촬영하였다.

시고하치의 얼굴
시고하치의 얼굴
객차
객차

구마가야 우동을 끝으로

구마가야는 밀가루 산지로 유명하다. 역사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구마가야 우동 한 그릇을 먹으며 당일치기 여행의 종지부를 찍었다.

구마가야 우동
구마가야 우동

도쿄의 일상에서 벗어나, 1212년에 한 번 공개되는 비불을 훔쳐보고, 억겁의 세월이 낳은 대자연의 기적 위를 거닐고, 지난 세대의 증기기관차를 타고 달리는, 시간의 척도를 느낀 하루였다. 시간. 가속도적으로 발전하는 시대에 시간의 척도는 점점 좁아져만 가는데, 가끔은 여유롭게 일상을 벗어나 시간 감각을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끝.

Footnotes

  1. 이케부쿠로가 왜 교통의 요충지인지 궁금하다면 빅카메라의 중독적인 테마송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2. 일반적인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撮り鉄」의 번역어로서 「찍새」라는 기존 한국어 용어를 참고 삼아 조어했다.